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블라디미르 레닌 (문단 편집) === 긍정 === >"나는 레닌을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친 사람으로 존경한다. 난 그의 방식이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신한다. 레닌과 같은 사람들은 인간성의 수호자이자 복원자이다." >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평가.[* Feuer, Lewis S. (1989). [[https://books.google.co.kr/books?id=7S_jiIbNq6cC&lpg=PP1&pg=PA25&redir_esc=y#v=onepage&q&f=false|Einstein and the Generations of Science. Routledge. p. 25.]]] 여러 문제를 떠나서 레닌이 세계 역사와 여러 사상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걸 결코 부인할 순 없으며 역사에서 그를 빼놓고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하운동이 벌어졌으나, 반대로 레닌에 대해서는 [[우상화]]가 유지됐다. 레닌에 대해 흠이 될만한 과오는 모두 숨겨졌으며, 이러한 숭상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역에는 많은 참배객이 모여들며, 레닌은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당시 시대상황에선 필요했던, 대체로 훌륭했던 위인으로 평해진다.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공산권 몇몇 국가들, 특히 구 소련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나 과거 공산권 국가였던 몽골에서는 영웅을 도와 악인을 무찌르는 산신령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주로 [[공민전쟁]] 시기 백군 압제자에 대항하여 맞서던 각국의 민족 영웅들이 고생하다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적군과 함께 돌아와 압제자를 몰아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거나 혹은 그냥 레닌이 와서 압제자를 몰아내고 고통받던 인민들을 해방시켜준다는 내용이다. 종종 러시아 바깥의 [[반러|반러주의자]] 중에서도 레닌에는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 단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로마이단 이후 레닌 동상들이 파괴된 사례를 보았을 때, 이 쪽은 아니다.] 특히 스탈린 이전 초창기 레닌시대의 소련은 러시아 민족국가를 초월해 세계 혁명의 전진기지이자 전세계 혁명가의 공통 조국의 성격이 있었고, 알려진 레닌 개인의 성향도 러시아 민족에 국한된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실제 레닌의 경우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폐지했고, 소련은 러시아계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며 러시아어를 법적 공용어로 지정하는 데 반대했다. 그 외에도 실질적 측면에서 인종 차별과 평등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정책적 성과 역시 상당했다. 이는 실제 레닌 집권 시기 소련을 방문했던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가 직접 목격하고, 인증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여성 해방론을 필두로 성차별 타파와 제도적 성평등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1919~1921년 편지와 연설문 등지에서 가족, 노동, 정치적 영역에서의 법적 평등권, 가사와 양육의 사회화를 기반으로 한 여성의 노동자화, 그리고 남성의 봉건적 의식 변화와 매춘 폐지 및 매춘부의 노동자화 등을 역설했다. 이에 [[10월 혁명]] 이후로는 낙태와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으며 가사노동의 공공화가 추진되었고 사생아에게도 친자와 동일한 권리가 주어졌다. 이러한 성적 자유화에 힘입어 성소수자 인권도 담론화되었는데, 1918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치체린은 커밍아웃한 게이였으며, 1923년 모스크바 사회보건원 원장인 그리고리 밧키스 박사는 "특정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한 성생활 문제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의 법은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을 공공도덕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법은 이것들을 소위 자연스러운 성교와 동등하게 취급한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소련의 사회적 여유는 스탈린 시대에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그래서 반스탈린, 반러적이면서도 레닌은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훗날의 러시아 중심적인 경직되고 폐쇄적인 소련은 전부 스탈린 때문이라고 깐다.[* 다만 스탈린주의가 소련 국내 정치에 집중하면서 대외 팽창을 자제하는 폐쇄적인 방침이었긴 했지만 스탈린이 딱히 민족주의자였던건 아니다. 소련이 민족주의적, 러시아적인 성향을 띄게 된건 2차대전에서 독일의 맹공에서 밀리면서 국민들의 집결과 선전을 위한 조치였지 그 전에는 범민족적인 기조를 따르고 있었다.] 반면 서방 세계에서 레닌은 원조 빨갱이, 빨갱이 교주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아무래도 소련의 수립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인 만큼 냉전기 [[프로파간다]]로 가루가 되게 까이는 사람이다. 그 혁명이라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의 몰살 및 체카의 수립, 반대파 숙청과 숱한 인민재판 등 도덕적인 면에 있어 끔찍한 패악이 벌어지곤 했으나,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볼셰비키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벌인 악행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권교체 과정에서 이전 왕조가 잔혹하게 근절되는 것은 조선의 [[왕씨 몰살]]과 같이 전근대 왕조 교체에서는 자주 나타났던 현상으로, 이전 세력의 구성원은 항상 새로운 집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 및 명분으로써 작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는 제정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체카 오흐라나의 전통이 있었으며, 레닌은 내전기 및 그 이후 시기에 벌어진 수많은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러한 정보전 및 비밀경찰을 제대로 활용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는 없는 행위이나, 적어도 혁명의 수립 및 그 수호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혁명가로서 황족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거나 비밀경찰을 활용하는 등의 행위는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는 것. 한편 레닌은 이러한 억압 도구를 새롭게 수립된 노동자 권력을 안정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한시적 필요에 의한 조치로 생각했고 권위주의적 통치기구의 활용 역시 극도로 유의하여 활용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스탈린의 경우는 그러한 통치기구를 오남용하여 통제와 폭력 자체가 일상화되고, 평범한 노동인민들까지도 감시하고 통제하는 체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주요한 차이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레닌의 언행이나 정책의 측면에서, 자신에 내세웠던 사회주의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이상을 공공연히 배신한 혐의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시공산주의가 끝나고 경제성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신경제정책]]이라는 자본주의화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좌익소아병이라고 까고 탄압한 적은 있다. NEP는 원래부터 현실적 필요에 의한 한시적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내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사회정책은 노동자-농민의 권익의 향상 및 일반적인 복지, 여성의 권리보장, 사회의 신분적, 계급적 관계의 철폐 등등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초의 열악한 세계환경 기준이지만. 예컨대 선거권이라든가. 문제는 1918년 내전과 함께 전시공산주의라는 비상상황이 벌어지면서 그 모든 것이 틀어져버린 것. 이를 계기로 정부와 농민의 관계는 극한으로 꼬이기 시작했으며, 입안된 수많은 정책들은 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내전이 종식된 상황에서 혁명은 고립되어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는 쫓겨나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통치기구가 스탈린 관료집단의 수중에 넘어간 결과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혁명 이후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있을지언정, 혁명활동 자체에 능력에 대해서는 자타공인 본좌.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감지해내고, 현재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대중과 동조하여 그들의 힘을 통해 일련의 목적을 수행해가는 면모는 가히 천재적이라는 평. [[공산주의]]에서 마르크스가 혁명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세웠다면, 레닌은 그 혁명을 어떻게 잘 해낼 것인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는 거의 빠져있던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 채워넣은 존재다. 공산주의가 괜히 교조를 기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야 이거 했다가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하고 벌벌 떠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은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라는 것을 잘 캐치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에서의 지지를 확보한 것. 주변인들은 죄다 우려한 그 10월 혁명도 결국 성공시키는 위엄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난세의 간웅이며, 한 나라의 건국자 자리를 꿰어차기에 손색이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레닌 살아생전에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가 부정된 적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와해된 것도 공산당이 탄압해서가 아니고, 전시공산주의 때 페트로그라드에 식량이 부족해지며 소비에트에 참가하던 노동자계급이 식량을 찾아 농촌으로 떠나버린 것이 결정타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해산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공산당에 입당해서 의견개진을 할 수 있었으며, 레닌이 살아있을 때에는 프라우다 지에 공산당 내의 토론 내용과 각 저명인사의 정치적 의견이 공공연히 실렸었다. 그 악명높은 분파금지령 이후에도 분파는 공식적으로 없어졌을 뿐 고스란히 남았을 정도.[* 볼셰비키의 의회 전복 같은 사건은 상황 자체의 맥락 파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은 정말 말 그대로 처참했는데, 일례로 착한 볼셰비키가 우리에게 토지를 나눠줬는데 나쁜 공산당이 다시 빼앗았다는 생각이 러시아 농민들에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내부에서는 우파와 좌파로 첨예하게 나뉘었고, 집권 사회혁명당 우파들은 기존의 러시아 지주들, 자본가들, 귀족 등 기득권과 단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혁명당 우파들이 당내 주요직을 거의 다 차지했다는 것. 정작 농민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던 건 사회혁명당 좌파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우파들은 백색테러를 몰래 지원하고 조장하녔다. 결국 이러한 레닌의 의회 전복에는 사회혁명당 좌파들이 대거 동참하였고, 이후 사회혁명당 좌파와 볼셰비키가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브레스트 조약 체결 이후의 이야기다.] 공산당 내에서도 레닌은 당수가 아닌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가장 저명인사로 남았으며,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이긴 했으나 레닌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행정부와 당이 분리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수상으로써의 권위로 당내 의사개진을 막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레닌의 후계자 선정인데, 실제로 그나마 인민참여적 민주주의, 즉 원리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긍정적이었으며 실제로 실천할 의지도 있었던 인물은 레닌의 후계자급 인물 중에서는 트로츠키밖에 없었으며, 레닌이 죽고 바로 권력을 잡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스탈린은 레닌을 신격화하며 가장 먼저 저지른 짓이 프라우다에 정치적 의견이 실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고 부하린도 이를 도와주었다. 레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것이 설령 자유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달랐을지언정 '''레닌이 더 오래 살았다면 소련이 민주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가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또한 러시아의 체제 전환 등을 이야기 하지만 오히려 레닌은 의견개진 및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명목상 국가원수였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가 레닌이 주장한 사회혁명당원 및 멘셰비키 당원의 사형을 막고, 오히려 대부분의 당원을 '''사면'''시켜버렸을 때에도 막지 않았다. 이렇게 사면된 이들 중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살려두었다면 엄청난 후환이었을 당대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이자 저명한 혁명인사인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도 있었다. 1919년 이후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나 비 볼셰비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복권되었으며 그중 많은 이들은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들을 죽인 것은 스탈린이지, 레닌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닌 집권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체제 전환 과정의 사회악 일소'''의 과정이었으며, 비록 외형적이고 방법론적인 유사성은 있었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을지언정 그 자체로 청산 대상이 되어버린 스탈린 집권기의 전체주의적 관료 독재와는 그 주체나 목적 면에서 본질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왕도였다는 것이 반스탈린계 레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레닌에 대한 옹호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고,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는 필요하지만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긍정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절대악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문제이다. 비판론은 '그렇다. 절대악이다'라는 관점을 전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